냉전이 끝나자 영화는 내부의 적을 찾기 시작했다
출처 채널: UDCV
승리한 세계가 잃어버린 것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다. 미국은 냉전에서 이겼고, 같은 해 걸프 전쟁에서도 압도적으로 이겼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 순간을 역사의 종말이라 불렀다. 자유 민주주의가 인류 이념 진화의 최종점이라는 선언.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최종점에 도달한 세계는 지루했다.
80년대 헐리웃의 문법은 명쾌했다. 미국 대 소비에트.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악당 소련 선수를 링에서 쓰러뜨리면 극장이 환호했다. 선악의 구도가 선명했고, 관객은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알았다. 그런데 90년대가 되자 그 슈왈제네거가 유치원에 잠입하고, 임신을 하고, 중년의 위기를 겪는다. 외부의 적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방향을 잃은 영웅뿐이었다.
악당의 주소가 바뀌었다
터미네이터 2에서 전편의 악당 T-800은 이제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그 자리를 채운 새 악당은 경찰 유니폼을 입고 관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국가 공권력이 악당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같은 해 용서받지 못한 자에선 마을을 지키는 보안관이 악당이었고, 골든아이와 미션 임파서블에서 적은 더 이상 KGB가 아니라 조직 내부에 있었다.
적은 이 나라 안에 있다. 어쩌면 이 나라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 인식이 90년대 헐리웃을 관통하는 첫 번째 흐름이었다. 법정 영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총을 든 테러리스트만큼이나, 왜곡된 사법체계와 진실을 은폐하는 정부, 타락한 기업이 설득력 있는 악당이 된 시대였다. Conspiracy Thriller와 Paranoia Thriller의 황금기는 우연이 아니었다.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외부의 적을 잃은 헐리웃이 만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거대 서사는 붕괴되었다. 절대적 진실은 없다." 80년대 블레이드 러너와 블루 벨벳에서 숙성되던 이 개념은, 외부의 적을 잃고 방황하던 헐리웃 산업과 만나 완벽하게 상품화된다.
결과는 불신의 엔터테인먼트였다. 식스 센스는 관객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하다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뒤집었다. 유주얼 서스펙트는 관객의 심리를 역이용했다. 양들의 침묵의 그 유명한 편집 — FBI 부대가 쳐들어가는 장면과 클래리스가 혼자 문을 두드리는 장면을 교차한 3분 — 은 관객의 인지능력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기만 전술이었다. 뒷통수를 더 세게 후려칠수록 더 훌륭한 영화가 되는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관람 문화를 낳았다. 영화를 한 번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 비디오를 되감고 단서를 찾아 인터넷에 올리는 시청자들. 독일 영화학자 토마스 엘세서가 마인드 게임 필름이라 명명한 장르가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는 그 정점이었다. 관객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처럼 자신의 기억력을 시험받으며,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설계도를 그려야 했다.
현실을 해킹하고 싶었던 사람들
불신은 현실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 확장됐다. 매트릭스는 단순히 가상현실을 다룬 게 아니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이 조작 가능하고 해킹 가능한 프로그램이라는 발상을 블록버스터의 중심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롤라 런의 주인공은 저장된 게임을 로딩하듯 현실을 리셋하고 재도전했다. 슬라이딩 도어스와 패밀리 맨은 평행 우주라는 아이디어로 인생의 기회비용을 판타지화했다.
이 흐름의 이면엔 하나의 전제가 있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현실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불만족스러운 현실은 수정하거나 탈출할 수 있다는 것. 비디오 게임과 가상현실이 일상화되던 시대의 감각이 영화 속 세계관으로 스며든 셈이었다.
가면을 쓴 시대의 얼굴
불신과 현실 의심이 내면으로 파고들자, 정체성의 문제가 등장했다. 짐 캐리의 고무줄 같은 얼굴은 단순한 코미디 테크닉이 아니었다. 고정된 진실이 사라진시대에 고정된 정체성마저 사라진 인간의 얼굴이었다. 마스크의 은행원 입키스는 가면 하나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판타지를 실현했고, 맨 온 더 문의 앤디 카우프만은 멀티계정을 운영하듯 또 다른 페르소나 토니 클립튼을 만들어냈다.
같은 해 에미넴은 슬림 셰이디라는 가상의 악당 자아를 내세웠고, 다프트 펑크는 자신들이 로봇으로 변했다고 선언했다. WWE는 가면극 엔터테인먼트의 전성기를 열었다. 페이스/오프에서 FBI 요원과 악당은 서로의 얼굴을 교체하며 상대방의 결핍을 채웠고,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껍데기 속으로 기어 들어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거나 성적 지향마저 바꿨다. 리플리의 주인공은 아예 인생 자체를 여러 겹의 가면극으로 운영했다. Y2K는 가면극의 시대였다.
그 판타지의 설계도를 폭로한 영화
데이빗 핀처의 파이트 클럽은 이 가면극의 메커니즘을 정면으로 해부했다. 이름 없는 화자는 극장에 앉은 관객의 자화상이었고, 타일러 더든은 그 결핍을 채워줄 판타지로 창조된 또 다른 자아였다. 영화는 결국 그 환상이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가면에 불과하다는 걸 드러낸다. 그리고 그 타일러 더든의 부업이 영사기 기사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는 스크린 위에 판타지를 투사하는 자였다. 관객에게 결핍된 주인공을 제시하고, 그 결핍을 채워줄 또 다른 자아를 스크린에 띄워 동경하게 만드는 것. 핀처는 그것이 헐리웃이 관객에게 판타지를 주입해온 방식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었다.
냉전이 끝난 세계는 안전했지만 공허했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현실을 의심하고, 가면을 바꿔 쓰고, 스크린 속 타인의 삶에 접속했다. 90년대 헐리웃은 그 욕망을 상품화하는 데 누구보다 능숙했다. 그리고 그 시대가 남긴 영화들은, 지금 돌아봐도 여전히 우리가 왜 스크린 앞에 앉는지를 가장 날카롭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