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밥그릇을 먼저 깨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출처 채널: 한경 코리아마켓

스스로의 일감을 줄이는 소프트웨어를 만든 광고 대행사가 있다. 얼핏 들으면 자해처럼 들리는 이 선택이, 사실은 가장 냉정한 생존 계산에서 나왔다는 걸 이해하는 순간 — 이 이야기는 광고업계를 훨씬 넘어선다.

버티던 쪽이 먼저 무너졌다

세계 최대 광고 그룹 WPP는 AI의 필요성을 몰랐던 게 아니다. 알면서도 늦었다. 전통적인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자부심이 기술 전환의 속도를 늦췄고, 그 사이 프랑스의 퍼블리시스가 치고 올라왔다. 코카콜라, 스타벅스, 화이자 같은 글로벌 고객사들이 줄줄이 이탈했고, WPP 주가는 9월 말 기준 56% 하락했다. 결국 CEO 교체라는 충격 처방이 내려졌다.

이 추락은 단순한 경영 실패가 아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시장이 먼저 당신을 바꾼다는 것을 가장 크고 비싸게 보여준 사례다. 그리고 WPP는 HSAD의 전략적 파트너이자 2대 주주(지분 약 30%)였다. 버팀목이 흔들리는 걸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본 쪽이 HSAD다.

절박함의 구조: 세 겹의 압박

HSAD의 위기감은 외부 충격만이 아니었다. 매출의 70~80%를 LG 그룹 계열사 광고 물량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그 계열사들이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 LG전자: 2021년 스마트폰 사업 종료로 글로벌 광고 물량의 큰 축이 사라졌다. TV를 포함한 H사업부는 올 2분기 영업적자 1,900억 원을 넘겼고, 희망퇴직까지 받고 있다.
  • 생활가전 부문: 미국 관세 압박과 중국 가전 업체의 가격 경쟁력 상승으로 성장세가 꺾였다.
  • LG생활건강: K뷰티 대표 브랜드 '후'를 앞세워 세계 시장을 흔들던 기세가 꺾였다. 올해 한 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65% 감소했고, 화장품 사업부는 적자를 기록했다.

계열사가 성장하면 광고 물량도 늘고, 계열사가 흔들리면 광고 물량도 줄어든다. 이 단순한 구조가 HSAD에게는 더 이상 기댈 수 없는 바닥이 되었다. 계열사 물량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결론은, 새로운 매출원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직결됐다.

자기 시장을 먼저 허무는 이유

그렇게 나온 것이 '브랜드 맞춤형 에이전트'다. 광고 기획부터 제작, 성과 측정까지 — 대행사가 해오던 일을 소프트웨어 하나에 담아낸 AI 플랫폼이다. 이 서비스가 잘될수록 전통적인 대행 업무는 줄어든다. 광고주가 대행사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광고를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밥그릇을 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르게 읽으면 이렇다. 기존 구조로는 어차피 성장할 수 없다. 빅테크인 구글과 메타는 이미 AI 광고 플랫폼으로 기획·제작·집행·성과 측정을 한 번에 끊고 있고, 광고주는 멋진 광고보다 당장 매출로 연결되는 성과를 원한다. 기존 모델이 유효한 것처럼 보이는 동안, 그 모델 자체의 수명이 줄어들고 있다.

"잘 만든 광고보다 잘 팔리는 광고가 중요하다." — HSAD 박 대표

이 한 문장이 전략의 축이다. HSAD가 공략하려는 새 고객층은 기존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중소·신생 브랜드, 그리고 LG 계열사와 사업이 겹쳐 일감을 주지 않던 다른 대기업 계열사다. AI 플랫폼이 진입 장벽을 낮추면, 이 잠재 고객들이 새 고객이 된다.

속도가 전략이다

HSAD 박 대표는 말했다. AI가 가져온 1년의 변화는 과거 10년치에 해당한다고. 빠르면 3년, 늦어도 10년 뒤에는 광고 대행사라는 형태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두려움의 언어가 아니라, 선택의 속도를 강조한 말이다.

WPP는 AI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헤리티지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속도를 늦췄다. HSAD는 파트너의 추락을 목격하며 그 자부심을 먼저 내려놓는 쪽을 택했다. 기술을 상품으로 파는 게 아니라, AI를 중심으로 스스로를 통째로 재설계하는 것을 독자 생존 전략으로 삼은 것이다.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었을 때 많은 사람이 실감하지 못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사건은 광고를 포함한 거의 모든 창조적 직종에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당신이 속한 산업은 아직 평온한가. 그렇다면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일 수 있다. 버팀목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 버텨주고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해볼 때다.

원본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H_frwj5M_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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