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츄는 왜 진화를 거부했을까, 생물학자의 대답
출처 채널: 김응빈의 응생물학
번데기 껍질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통통하게 잎을 갉아먹던 애벌레가 어느 날 움직임을 멈추고, 껍질 속에서 스스로를 해체한다. 근육이 녹고, 소화 기관이 재편되고, 몸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세포들이 폭발적으로 증식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비가 태어난다. '응박사의 포켓몬 연구소'는 그 장면에서 출발해 생물학의 핵심 개념들을 차분하게 꺼내놓는다.
포켓몬의 진화는 진화가 아니다
영상은 처음부터 선언에 가까운 말로 시작한다. 포켓몬의 진화는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가 아니다. 생물학적 진화란 개체가 변하는 게 아니라 집단이 변하는 것이다. 수많은 세대를 거치며 유전자의 빈도가 달라지고, 환경에 유리한 형질이 쌓여가는 과정이 진화다. 파이리가 리자드가 되고 리자드가 리자몽이 되는 건, 같은 개체가 직접 변하는 것이니 생물학적으로는 변태, 즉 탈바꿈에 훨씬 더 가깝다.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형태의 생물로 변하는 건 진화가 아닙니다. 수백만 년 동안 축적된 변화의 결과가 오늘날의 우리니까요."
올챙이와 개구리를 나란히 놓고 보면 이해가 빠르다. 아가미로 숨 쉬며 꼬리로 헤엄치는 올챙이와, 폐로 숨 쉬며 땅 위를 뛰어다니는 개구리. 아무것도 모르고 둘을 보여주면 다른 동물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다르다. 포켓몬의 진화가 낯설지 않은 건, 자연이 이미 그보다 더 극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벌레 몸속에 나비가 숨어 있다
곤충의 완전 변태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드라마틱하다. 애벌레 몸속에는 성충판(imaginal disc)이라 불리는 특별한 세포 덩어리가 있다. 날개, 다리, 더듬이, 겹눈을 만들 세포들이 이미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번데기 단계에 들어가면 호르몬 변화가 시작되고, 애벌레 조직 상당 부분은 해체되거나 재구성된다. 성충판 세포들은 그대로 살아남아 폭발적으로 증식한다.
나비는 어디선가 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애벌레 몸속에 처음부터 숨어 있던 미래의 모습이었다.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짓는 일과 비슷하다. 재료는 이미 거기 있었다.
왜 이렇게 복잡한 방식이 선택되었을까. 애벌레와 나비는 필요한 능력이 완전히 다르다. 애벌레는 먹고 자라는 게 일이고, 성충인 나비는 이동하고 번식하는 게 일이다. 먹이도 다르다. 애벌레는 잎을 갉아먹고, 나비는 꽃꿀을 먹는다. 성장 단계마다 서로 다른 자원을 이용하면 같은 종 안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 경쟁을 줄일 수 있다.
진화를 거부하는 포켓몬, 선택하는 생물
영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진화를 거부한 포켓몬들 이야기다. 지우의 피카츄는 라이츄가 될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다. 이상해씨는 진화 축제에서 이상해풀로 진화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보통 생물은 성장 경로를 선택할 수 없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건 개체의 의지가 아니라 운명이다.
그런데 생물학에는 이에 가까운 현상이 실제로 존재한다. 표현형 가소성(phenotypic plasticity)이다.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도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나 행동을 나타내는 현상이다. 어떤 곤충은 개체 밀도가 낮을 때는 혼자 조용히 살다가, 주변에 동료가 많아지면 몸 색깔과 행동까지 바꾸며 집단 이동을 시작한다. 포식자가 나타나면 몸에 가시를 만드는 물벼룩도 있다. 단, 그 가시를 만드는 데 에너지가 들고 헤엄 속도가 느려진다는 대가가 따른다.
"생물의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이죠."
피카츄가 라이츄가 되는 건 단순히 강해지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라이츄가 되면 얻는 능력이 있지만, 피카츄 상태에서만 유지되는 장점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포켓몬의 진화는 정해진 코스가 아니라, 환경과 경험에 따라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표현형 가소성의
극단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좋은 질문이 과학을 시작한다
영상은 한 시청자의 질문에서 출발해 변태, 완전 변태와 불완전 변태, 표현형 가소성까지 생물학의 핵심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해낸다. 포켓몬이라는 친숙한 소재가 낯선 개념을 향한 문을 열어주는 셈이다. 과학은 답을 아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된다는 영상의 마지막 말이 오래 남는다.